[월간 제50호] 2024년 4월
이호백(81응미)
본지는 갤러리PAL에서의 전시를 앞두고 있는 그림책 작가이며 그림책 출판사 ‘재미마주’의 대표인 이호백 동문을 만났다.
전시를 열게 된 계기는?
나는 지난 20여 년간 전국의 어린이들을 만날 때 ‘어린이 책을 만드는 아저씨’입니다‘라고 나를 소개하곤 하였습니다. 결혼 후 90년대 초 파리에서 아이와 함께 살면서 20세기의 위대한 그림책 작가들의 책을 보며 그림책 작가를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꿈을 현하기 위해 출판사부터 만들기로 하고, 1994년부터 2년간의 ‘길벗어린이’ 운영팀의 경험을 살려 1996년 나의 독립된 출판사 ‘재미마주’를 창설하게 됩니다. 어린이 책을 만드는 모든 일에 즉, 기획자로, 글 작가로, 또 그림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그래픽 디자이너로, 재미마주의 모든 어린이 책 프로듀싱에 관여해, 일찍이 1인 출판의 최고령 선배의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든 책들은 2000년대 초에 뉴욕타임스,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박람회 등 여러 국제적인 기관의 어린이 책 상을 수여하게 됩니다. 책을 만드는 일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그림을 그릴 때입니다. 무수히 많은 어린이 책 사이에서, 내가 만든 책에서만큼은 어린이가 마치 자신만을 위한 한 권의 화집을 접하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생각을 담아 책을 만들어 왔습니다. 내가 어린이와 소통하는 화가의 마음으로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선보이게 된 것입니다.
미대 졸업 후 꿈의 실현 과정은?
미대를 다니는 동안에는 사실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몰랐습니다. 막연하게 꿈을 키우게 된 것은 대학 때 우연히 갖게 된 두 권의 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대학교 1학년때 큰 매형이 도쿄의 한 서점에서 구해주신 20세기 유명 작가인 토미 웅거러(Tomi Ungerer)의 그림과 반전 포스터, 광고와 잡지를 위한 일러스트레이션을 모아놓은 화집 1권이었고, 또 하나는 대학교 2학년말에 교보문고에서 구매한 영국의 작가인 찰스 키핑(Charles Keeping)의 인터시티(Inter-city)라는 글 없는 그림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런던의 서민들이 ‘인터시티’라는 전철을 타고 목적지에서 내리는 일상의 모습과 창밖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책이었는데, 언젠간 나도 이런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준 책이었습니다. 출판사는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고, 그림책 작가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었는데, 아직 꺼내야 할 작품들이 내 안에 많이 있기에 앞으로 신작을 더 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서너 권 더 나오게 된다면, 나름 작가라는 소리를 들어도 쑥스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장화정 실장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우리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결혼 후 바로 파리에 가서 5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장화정(삼성어린이박물관 전시기획자겸 서울상상나라 학예실장) 실장은 그곳의 에스티엔느라는 고급 인쇄 문화 학교의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어린이 책 출판사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무렵 저는 어학을 마치고 파리 2대학의 ‘이미지와 커뮤니케이션 인스티튜트’(IMAC)의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대학 때 막연히 꿈꾸었던 그림책 작가가 되기 위해 책에 대한 여러가지 아이디어를 끄적이며 같이 출판을 상의하곤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곳의 공공도서관에서 그림책을 보면서 이런 훌륭한 문화가 우리에게 없음을 떠올리며, 한국에 돌아 가면 그런 문화를 만드는 일을 개척해보고 싶었습니다. 장화정 실장도 파리의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문화 시설에 깊은 감명을 받아 한국에서도 파리의 라 빌레트(La Villette) 안에 어린이를 위한 과학관이나 뮤제 언 에르브(Le Musée en Herbe)같이 예쁜 어린이 박물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둘이 분야는 좀 다르지만 당시 한국에는 없었던 새로운 문화의 두축 ‘그림책’과 ‘어린이박물관’의 실무자로서 뛰어든 최초의 장본인들인 것은 맞습니다.
한국의 책 만들기 현실은 어떤지?
일단 지금 우리나라의 그림책은 K-POP만큼이나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이 많이 생긴 덕이죠. 그래서 국제적으로 우리나라의 책 만드는 기술과 능력은 월등히 우수한 나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변하지 않은 부분도 있는데 첫째는 그림책의 원료인 종이의 질이 과거에 비해 크게 발전한 것 같진 않습니다. 또한 우리나라가 그림책의 발전은 눈부시게 이루어 가고 있지만, 그림책과 같은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매체가 존재하는 이유, 즉 그것이 지향하는 자유롭고 다양한 생각이 어린이 문화 속에서 자리 잡아 나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K-POP이 세계를 누비고 있는 것과 연계하여 발전시킬 수 있는 밝은 청소년 문화는 어떤 형태가 있을까요? 나는 원하는 청소년들에게 학교와 집과 가까운 공공장소에서 언제든 춤과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저렴한 형태의 배움과 문화의 공공적인 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가 이번에 이탈리아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박람회(BCBF)의 일러스트레이션 선정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다녀왔어요.(▲사진) 그 곳에서 20, 30대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엄청 많이 감상하면서 선정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저와 3명의 다른 심사 위원들이 지금의 일러스트레이션의 흐름에 큰 뜻에서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멋진 일러스트레이션보다, 그림책에 대한 멋진 아이디어보다 중요한 것은 멋진 사람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서 기계적이기보다는 인간적이고 편안한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런 감성은 그림 테크닉에서 나온다기보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라 이 시대에 더욱 강력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