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제51호] 2024년 5월
오치균(76회화) 작가
오치균(76회화)
본지는 지난 5월 3일에 압구정동에 개관한 오치균 미술관(Oh Museum of Art)을 찾았다. 옥션 작가로 최고를 찍으며 유명작가로 알려졌었던, 7년 만에 모습을 보인 오치균 동문은 청년작가로 다시 태어난 듯 열정과 예술혼이 묻어난 평면과 설치작업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학창시절 창의적 발상으로 소문났다는데 추억이나 에피소드는?
시골에서 서울로 유학 온 나는 당시 현실과 이상의 갭이 많았던 것 같다. 입학한 후 어린 마음에 튀고 싶었고 자진해서 과대표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동기들의 찬성으로 과대표로 선정되어 첫MT를 도봉산장으로 가자고 했다. 수업을 마치고 관악캠퍼스에서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던 도봉산장까지 과동문들을 인솔하고 올라갔는데 이미 해는 지고 있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곧 깜깜한 도봉산을 하산해야 했다.
유학시절 미국생활은 어땠나?
한국생활에 지루함을 느끼던 시절 미국유학을 강행하게 됐다. 미국영화에서 보던 엄청 바쁜 삶을 동경하며 떠난 나는 그러한 미국 생활이 드디어 현실이 되었다. 저렴한 집세로 택한 지역이 우범지역으로 위험했고 세탁소 아르바이트 등으로 고된 시절이었지만 수업시간에 담배를 피워도 다리를 책상에 올려놓아도 통제하지 않는 교수님들의 자유분방함이 좋았다. 또한 이렇게 바쁘고 성실한 하루하루가 내게는 기쁨과 책임감에 충만한 삶으로 다가왔다. 어린시절 어머니께서 쉬지 않고 안팎에서 일하셨듯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튀는 행동이나 복장을 해 오던 내가 이렇게 자유를 허용하는 미국에 가서는 오히려 평범하게 살게 되었다.
작가가 된 계기 및 여정을 간략히 설명한다면?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중 · 고등학교 시절 자연스럽게 미술반 활동을 했다. 사실 미술학원에 다닐 형편이 못 되어 지방의대를 지원하였으나 낙방하게 된다. 이러한 나에게 작은 누님께서 본인의 퇴직금으로 미술학원비를 지원해주어 입시미술을 공부하였고 모교에 입학 하였고 지금까지 작품을 하니 자연스럽게 직업 화가가 된 것이다. 생활고로 바쁘신 부모님은 내가 어느 학교를 진학하더라도 신경 쓸 틈이 없으셨으므로 내가 하고 싶은 미술을 자유로이 전공으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니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을 택할 수 있었던 나는 행운아인 셈이다.
따님도 미술을 한다고 들었는데…
외동딸이지만 어려서부터 독립적이고 검소하였고 그림그리기를 좋아하여 선화예중에 입학했다. 당시 유명세를 타던 나에게 부담을 느꼈는지 미국 뉴욕에서 공부한 후 현재 뉴욕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다. 아빠 찬스를 거부한 딸은 내 작품과는 다른 반추상적, 독창적인 서양화를 그리는 중이다.
미술관을 개관하게 된 계기와 과정은?
나는 나의 작품을 사랑한다. 나의 작품은 내가 그렸지만 늘 신이 내 옆에서 함께 도와줘서 탄생한 것이라고 믿는다. 특히 내가 아끼고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을 현실적으로 현명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미술관 설립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내 작품을 보여주고 보관하고 좋아하는 지인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하기 위해 작업실로 사용하던 곳을 수년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만들었다. 개관전으로 1년 6개월간 6개월씩 3부로 나누어 내 작품전시를 릴레이식으로 진행하고자 한다. 차별화된 세계적 미술관으로 발전시키고 싶다.
앞으로의 포부가 있다면?
남의 시선에 상관없이 나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이 요구하는 대로 자유로운 예술혼을 불태우는 노년을 살고 싶다.
동창회나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그랬듯이 충고나 조언보다는 본인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살아가길 바란다. 그리고 모교는 나의 뿌리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모든 동문들이 동창회에 애정을 갖고 동창회가 하는 다양한 사업에 관심을 가진다면 본회가 더욱 활성화되어 각자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오치균 미술관 www.ohmuseumofart.org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159길 34(신사동)